몸의 자세 - 우 실라난다 사야도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06-12-16 10:37     조회 : 7441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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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자세      


몸에 대한 관찰에 관한 두 번째 소절(subsection)은 “몸의 자세”라 불립니다. 여기서 자세는 몸의 네 가지 움직임, 즉 가는 것 또는 걷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그리고 눕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자는 위빠싸나 수행 중에 네 가지 자세 모두를 사용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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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가 가고있을 때 “나는 가고있다”고 알아차리고, 그가 서있을 때 “나는 서있다”고 그는 알아차리고, 그가 앉아있을 때 “나는 앉아있다”고 그는 알아차리고, 그가 누워있을 때 “나는 누워있다”고 그는 알아차리고, 또한 그의 몸이 어떤 상태에 있게되자마자 그는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비구는 알아차린다”는 수행자는 철저히 알아차린다, 그는 깊이 알아차린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겉만의 앎이 아니고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앎입니다. 수행자는 가고, 서있고, 앉았고, 누워 고를 명백히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갈 때 “나는 간다”, 걸을 때 “나는 걷는다”, 서있을 때 “나는 서있다, 누워있을 때 “나는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챙김은 몸의 모든 자세에 적용해야합니다.


마지막 문장인“그의 몸이 어떤 상태에 있게되자마자 그는 그것을 알아차립니다”는 다른 해석을 하게 허용합니다. 주석자 (the commentator)는 이 문장은 앞의 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네 가지 자세 모두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뜻은, 수행자가 갈 때 “나는 간다”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있을 때 “나는 서있다” 등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충 주석서의 저자는 이 문장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에 의하면, 비구는 그가 갈 때 ‘나는 간다’는 등을 알아차린다는 말에서 다른 자세들을 강조했으나 마지막 문장인“그의 몸이 어떤 상태에 있게되자마자 그는 그것을 알아차립니다”는 몸 전체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그의 몸 전체가 간다, 서있다, 앉았다, 또는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마지막 문장에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갈 때 “나는 간다”등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앞에 문장에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일 것입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더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사야도께서는 그 문장은 몸의 모든 작은 동작과 자세, 감, 섬, 앉음과 누움뿐만 아니라 뻗침, 구부림, 또는 앞으로 또는 옆으로 보는 것 등 작은 동작도 포함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자, 특히 위빠싸나 수행자는 작은 동작과 자세를 마음으로 챙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작은 움직임의 알아차림에 실패했을 때 갈망 또는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빠싸나 수행할 때 수행자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어떤 상태에 있게되자마자 그는 그것을 알아차립니다”라는 문장에 모든 여러 움직임을 포함시켜야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네 가지 주요 자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작은 자세도 수행대상으로 해야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집중 수행 때뿐만 아니라 어느 때건 항상 알아차림이 있어야합니다.                        


이 문장 또는 가르침에 대하여 오해가 좀 있었습니다. 이들 오해는 근래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오해)은 주석서가 쓰여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경전이 속한 (법문의)부 에 대한 주석서는 약 2100년 전에 쓰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벌써 그가 가고있을 때 “나는 가고있다” 등을 알아차린다는 뜻에 관하여 오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문장의 진정한 뜻을 모릅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위빠싸나 수행을 비웃으며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보통사람과 동물조차도 그들이 갈 때 ‘나는 간다’고 압니다. 그들이 서있을 때 또는 앉아있을 때 또는 누워있을 때 수행자는 ‘나는 간다’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수행자가 갈 때 그들이 간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나는 간다‘를 알 때, 어떤 사람이 가고 있는 것을 수행 또는 마음챙김의 대상이라고 일컫는다면,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항상 위빠싸나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보통사람의 앎과 위빠싸나 수행자의 앎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둘은 정반대로 대립된다는 것이 대답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갈 때 “나는 간다”를 어떻게 아는지 봅시다. 가는 것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가려는 원함 또는 의도가 있어야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갈 때 “나는 간다”라고 알 때, 수행자는 가는 것이 일어날 때 매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때는 피상적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가려는 의도와 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앎은 피상적이고 잊기 쉬운 것입니다. 그들이 갈 때 “나는 간다”고 말할 때, 수행자는 정신적인 의도와 물질적인 몸의 움직임이 서로 떨어져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애매한 견해만 갖습니다. 수행자는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가는 것의 정신적 물질적 양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위빠싸나 수행을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앎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의도의 연속적인 순간들 뒤에 몸의 연속적인 움직임이 따른다는 똑바른 앎 (direct knowledge)을 갖지 못합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수백 개의 생각의 순간들이 오고간다고 합니다. 이 순간들이 어떤 물질적 특성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의 위대한 요소가 있는바-- 땅 (地), 물(水), 불(火), 바람(風)을 말합니다. 움직임에는 바람의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원함 또는 의도가 움직이려고 하는 몸의 부분들에 바람의 요소가 일어나도록 합니다. 그 바람의 요소가 몸 또는 몸의 부분을 움직이게 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처럼 가는 것을 면밀히 관찰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는 가는 것이 의도 또는 원함에 의하여 일어나는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구성되었음을 모릅니다. 수행자는 가는 것이 어떤 사람 또는 어떤 높은 권능 또는 어떤 영원한 실체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수행자는 간다는 행위가 오직 의도와 가는 것만으로 구성되고 그 외의 것은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수행자는 의도와 가는 것 외에 어떤 개인도 존재도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나, 또는 남자 또는 여자라는 것은 없으며, 의도와 가는 것 또는 같이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만 있습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단지 매우 애매한 생각만 가졌기 때문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의 면밀한 관찰 없이는, 수행자는 의도와 가는 것 또는 몸의 움직임이 다음순간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수행자는 가는 순간 일어나는 의도와 가는 것이 다음순간으로 이끌고 그 순간에서 또 다음으로 이끈다고 생각 못합니다. 수행자는 가는 과정을 계속적이고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수행자는 매순간 의도는 오고 간다는 것을 이해 못합니다. 몸의 움직임과 바람의 요소는 오고 그리고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한순간의 의도가 다른 순간으로 옮겨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 경험하는 것이며,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이와 같이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걷는 것 또는 가는 것에 대한 앎은 챙기지 않아 잊기 쉽습니다. 길거리에 걷는 사람을 세우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십중팔구, 수행자는 걷는 것 자체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그들의 가정 또는 직장에 대하여 생각하고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순간 걷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앎은 피상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똑같은 존재(being), 하나의 똑같은 개인(individual)이 과거에 있어왔고, 지금현존하고,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수행자는 덧없음(impermanence, 無常)에 대하여 어렴풋한 생각을 가졌으나 하나의 똑같은 인격(person)이 있어왔고, 지금현존하고,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분석결과에 의하면 존재라는 것은 전혀 없지만, 그들의 앎은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의도와 몸의 움직임이외에 인격 또는 개인은 없습니다.                           


수행자는 의지와 움직임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지합니다. 그들의 앎은 영원한 실체의 개념 또는 영혼의 개념을 버릴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가는 것 이외에 의도 이외에 가는 것을 관리하고 가는 것을 보살피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앎은 깜마타나(kammatth -ana),즉 위빠싸나 수행의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팔리어로 위빠싸나 수행, 깜마타나는 한층 더한 발전을 위한 조건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것이 위빠싸나 수행일 때, 깜마타나 일 때, 그것은 진전하기 위한 조건이어야 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은 한층 더한 발전을 위한 조건 또는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앎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깜마타나 위빠싸나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챙김이 없는 앎은 마음챙김의 대상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사람의 앎은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과는 아주 다릅니다. 걷는 중에 위빠싸나 수행을 하면 수행자는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한 걸음의 세 가지 단계--들림-나아감-내림, 들림-나아감-내림--를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걷는 과정을 면밀히 지켜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걸음이 생길 때마다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의도와 가는 것 자체를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충분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각개의 의지작용의 기초를 이루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관찰하게될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그들이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동안 그들이 걸을 때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이 뒤에서 그들을 민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의도가 그들의 몸을 움직이는 것을 깨쳤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의도와 움직임을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의도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수행자는 그것들을 알아차리는데 왜냐하면 수행자는 걷는 행위를 면밀히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의도와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그것을 서로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가는 것 또는 걷는 것은 걸으려는 또는 가려는 의도가 원인입니다. 걸으려는 또는 가려는 의도가 있을 때 감 또는 걸음이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 두 가지 것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위빠싸나 수행 할 때 관찰하는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또한 원함 또는 의도의 연속적인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몸의 연속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의 생각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백의 움직임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 조그마한 움직임들이 수행자에게 하나의 큰 움직임인 것 같이 보입니다. 수행자가 걸을 때 마음챙김을 갖게되면 이것을 보게 됩니다.


수행자들은 간다는 행위에는 오직 의도와 가는 것만 있고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압니다. 수행자는 존재, 인격, 인간 또는 걷는 나, 가는 나를 보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가는데 오직 이들 두 가지만 알아차립니다.


수행자가 의도와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면, 이들 의도와 움직임이 아주 빨리 오고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들 의도와 움직임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진정한 집중을 이루었을 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싸나 수행자의 앎은 완벽하고, 명료하고, 정확합니다.


수행자가 의도와 가는 것 이외에 어떤 존재 또는 어떤 사람을 볼 수 없을 때, 수행자는 가는 것을 사람이 간다고 보지 않고 단지 의도와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수행자는 가거나 걷는 행위에 어떤 사람, 어떤 행위자를 보지 못합니다. 수행자가 의도와 가는 것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지금 가고있는 것은 마음과 몸으로 조금 전에 존재했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우칠 것입니다.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마음, 새로운 물체 또는 새로운 몸이 일어나고 앞의 것들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한순간 존재하던 마음과 몸 또는 의도와 가는 것이 다음순간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그것들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다음순간 새로운 의도와 새로운 움직임이 있습니다. 매순간마다, 그것들은 재생되는바 새로운 의도와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이든 과거에 있던 것과 같지 않고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있을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매순간, 현재, 과거, 또는 미래에, 모든 것은 항상 움직이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수행자가 이것을 알 때, 그의 앎은 그의 인격 (person) 또는 개체(individual)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수행자가 의도와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가는 행위에서 사람이나 어떤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마음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인격 또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있고 그들의 앎은 그들이 영원한 실체, 영혼, 또는 자아(自我)에 대한 인식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가는 것 또는 걷는 것에 대한 수행자의 깊은 이해는 수행자가 더욱 발전하는 기초 또는 조건입니다. 수행자는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고 수행자는 최종 단계의 깨달음(attainment)에 도달할 때까지 수행자는 집중력과 지혜를 더더욱 향상시킬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의 수행자의 앎이 집중력과 지혜를 더욱 발달시키기 위한 기초 또는 조건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깜마타나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챙김이 수행자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가는 것, 서있는 것, 앉는 것, 그리고 눕는 것을 관찰할 때, 오직 이것만을 마음챙김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싸나 수행하는 사람의 앎은 수행이고 마음챙김의 대상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하던지, 그것은 깜마타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가는 행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깊게 알고, 명백히 알고. 정확히 알 때; 수행자가 오직 가려는 의도, 가는 것 자체만 있고,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이 세 가지의 질문, 즉 누가 가는가? 가는 것은 누구 것인가? 왜 가는 것이 일어나는가? 에 관하여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누가 가는가?”라고 물으면, 대답은 “살아있는 존재 또는 사람 어느 것도 모두 아니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가는 행위에서 가려는 의도와 운동을 일으키는 또는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바람(風)의 요소의 널리 퍼짐(放散)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가는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존재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는가?”에 대한 대답은 “살아있는 존재 또는 사람 어느 것도 모두 아니다”입니다. 가려는 의도, 바람 요소의 움직임과 이에 따른 몸의 갖가지 부분의 움직임 이외에 가려는 아무 존재도 사람도 없습니다.


가는 것은 누구 것인가? 가는 것을 소유하거나 가는 것을 관장하는 사람 또는 권능이 있는가? 수행자는 그와 같은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떤 살아있는 존재 또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 또는 사람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 또는 사람에 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의도와 움직임만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없습니다. 가는 것의 소유자는 없으며 가는 행위를 관장하는 사람도 권능도 없습니다. 왜 가는 것이 일어나는가?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바람 요소의 널리 퍼짐 때문에 가는 것이 일어납니다. (네 가지 주요요소-四大要素-에 대하여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수행자가 가고싶을 때, 첫째 가려는 원함 또는 의도가 있고 그리고 이 원함 또는 의도 또는 가려는 마음이 가는데 필요로 하는 몸의 부분들, 예를 들면, 발에 바람 요소를 일으키고 그리고 바람 요소가 몸의 부분을 움직이게 합니다.                         

       

왜 가는 것 또는 걷는 것이 있는가? 다음의 세 가지 요인 때문인데: 가는 것을 원하는 마음,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 그리고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하여 일어나는 몸의 갖가지 부분의 움직임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마차가 있고 네 마리 말이 그것에 매여 있으며 그리고 한사람, 마부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마부는 말들을 움직이게 해서 말들은 움직이고 말들의 움직임과 함께 말은 마차를 움직입니다. 몸의 움직임은 마차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몸은 마차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말들은 마음에 의하여 일으켜지는 바람의 요소와 같습니다. 마음은 마부와 같습니다. 마음 또는 마부는 말들을 움직이게 하고 또는 바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합니다.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과 함께 몸 전체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 또는 걷는 것 또는 움직이는 것은 함께 일어나는 세 가지 요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마음, 바람의 요소, 그리고 움직임입니다. 수행자는 이것을 가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완벽하게 아는 수행자들은 가는 행위에서 어떤 살아있는 존재, 어떤 영원한 실체를 볼 수 없고 “사람이 간다”, “사람이 걷는다”라는 어법(語法)은 오직 편리를 위함이고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됩니다. 이러한 표현 또는 말들이 쓰이지만, 가려는 의도와 몸의 다른 부분들의 실제 움직임 이외에 실제로 가는 사람 또는 남자 또는 여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싸나 수행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로 가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가는 것에 대한 진정한 앎 또는 올바른 앎을 달성했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수행자는 가고, 서있고, 앉고, 눕고 그리고 몸의 다른 모든 움직임들을 압니다. 그렇게 하여 몸이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바람의 요소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이 있고 이 바람의 요소가 몸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움직임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람의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바람의 요소가 없다면, 움직임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하여 가는 배와 같이,

        활시위의 힘에 의하여 가는 화살과 같이,

        이 몸도 앞의 방향으로 가나니,

        바람의 활기찬 밀침에 의하여 완전히 밀쳐지고,

        끈으로 꼭두각시의 등을 맨 것처럼,

        마음으로 몸-인형을 연결하고,

        그리고 그것에 끌리어 몸이 움직이고, 서고, 앉는다.

        그것을 떠받치는 조건들 없이, 그자신의 정신적인 힘의 의지력에 의하여,

        서거나 걸을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이들 조건들 없이, 이들 떠받치는 원인들 없이, 걷는 것도, 앉는 것도, 서는 것도, 또는 움직이는 것 모두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수행을 통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배웁니다. 수행자는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꿰뚫어보는 앎(direct knowledge)을 얻습니다. 수행자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six sense doors)을 통하여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사람의 앎과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은 아주 다릅니다. 사실은 그들의 앎은 정반대로 대조됩니다. 수행자들이 의도와 가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 이 둘은 두 가지의 독립된 것들이라는 것,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에 대한 앎을 계발했을 때, 수행자는 의도와 가는 것이 매순간 나타나고 사라짐을 압니다. 오직 그때만이 수행자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에 대한 올바른 앎과 올바른 이해를 가졌다고 말해집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안으로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그는 몸에 대하여 몸을 밖으로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그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안과 밖으로 함께 관찰하며 지낸다

                 

수행자가 그들 자신의 가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또는 눕는 것 그리고 다른 작은 거동들을 관찰할 때, 수행자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안으로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때로는, 수행 중에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가고, 서고, 앉고, 누워있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가고 앉는 것이 덧없고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가는 것, 앉는 것, 서있는 것 그리고 눕는 것도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관찰하면, 수행자는 “몸에 대하여 몸을 밖으로”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이 수행할 때 그들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수행 중에 “내가 가거나 움직이는 것이 덧없고, 오고 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가고 오는 것도 그럴 것이다”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입니다. 수행자가 이런 방식으로 관찰하면, 수행자는 “몸에 대하여 몸을 밖으로”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때로는, 수행자가 그들 자신의 가는 것과 다른 사람의 가는 것에 대하여 이리저리(back and forth) 관찰합니다. 이리저리 관찰할 때, 수행자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안과 밖으로 함께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이것 또한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수행 중에 어떤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그것을 추리의 위빠싸나(inferential vipassana)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위빠싸나(direct vipassana)와 추리의 위빠싸나(inferential vipassana) 두 종류의 위빠싸나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가는 것, 앉는 것, 서있는 것, 누워있는 것에 대하여 직접적인 위빠싸나를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가는 것 등을 수행할 때, 수행자는      추리의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것이 덧없듯이, 다른 사람의 가는 것도 그럴 것이다” 라고 추리하여, 수행자는 다른 사람의 가는 것, 앉는 것, 서있는 것, 누워있는 것 에 대하여 관찰합니다. (3부의 수행지침을 보십시오.)

                

그는 몸에 대하여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origination factors)을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몸에 대하여 사라지게 하는 요소들(dissolution factors)을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몸에 대하여 일어남과 사라지는 요소들을 함께 관찰하며 지낸다.

   

이 구절은 또 다시 반복됩니다. 경전에서 말한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origination factors)"은 몸 또는 물체의 일어남의 원인과 또한 일어남 자체를 뜻합니다. 물체가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아비담마 (Abhidahamma; 논장)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들 원인들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수행자가 여기 있는데 그것은 수행자가 과거에 어떤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여기 있는 것은 자신의 깜마(kamma-業) 때문입니다. 깜마는 몸이 생기는 원인입니다. 깜마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려는 어떤 갈망(bhava)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갈망을 갖은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비록 갈망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릅니다 그리고 무지는 더 좋은 삶을 갈망하도록 합니다. 수행자는 깜마를 쌓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이 좋은 삶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이 생애에서 물질적 특성의 일어남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는바, 과거의 무지, 과거의 갈망, 과거의 깜마 그리고 현재 몸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이 있습니다. 음식 또한 물질적 특성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때때로, 수행 중에 수행자는 몸의 일어남 또는 물질적 특성의 일어남의 원인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거나 관찰합니다. 몸이 여기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깜마를 가졌기 때문이고 또는 내가 갈망을 가졌기 때문이고 또는 내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수행자는 일어남 자체를 알게됩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을 조금밖에 안가진 수행자는 일어남의 원인보다는 일어남을 알아차리기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수행자가 걷는 것 또는 가는 것에 마음을 챙기면, 수행자는 원함의 일어남과 움직임의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네 가지 원인 또는 일어남 자체를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origination factors)을 관찰하고있다”고 말해집니다.


“사라지게 하는 요소들(dissolution factors)"은 무지의 없음, 갈망의 없음, 깜마의 없음, 그리고 음식의 없음입니다. 이것들은 소멸의 원인들 또는 물질적 특성의 사라짐 또는 사라짐 자체입니다. 수행자가 “사라지게 하는 요소들”에 대하여 관찰할 때, 원함(desire)이 있을 때는 “원함, 원함”하며 원함을 관찰하고 그리고 그것이 소멸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한순간 움직임이 있고 다음 순간 그것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것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때, 수행자는 또한 여러 가지 현상의 사라짐 또는 소멸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이들 요소들 중 하나를 알아보면, 수행자는 몸을 사라지게 하는 요소들, 네 가지 원인들, 그리고 하나의 소멸을 알아차린다고 말해집니다.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origination factors)에도, 네 가지 원인들과 하나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현상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불리는 위빠싸나 앎(vipassana knowle -dge) 의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는 사라짐의 징조를 분명히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일어남(rising) 사라짐(falling)을 알아보는 앎의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히 그리고 생생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다음 단계에 도달하면, 사물의 사라짐에 대한 앎,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생생하게 됩니다. 수행자가 이들 단계에 도달하면, 두 가지를 함께 아주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또는 “몸만 있다”라고 하는 그의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그리고 한층 더한 앎과 마음 챙김을 위하여 정말 필요한 정도로 그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수행자가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완전히 알아차릴 때, 사람이나 영원한 실체가 아닌 몸만 있다는 것을 압니다. 초기단계에는 몸만 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진보하면, “몸만 있고 그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마음챙김을 확립하게될 것입니다.  

        

갈망과 틀린 견해에 의한 어떤 것에도 의존(또는 집착)하지 않고 그는 지낸다. 또한 그는 다섯 무더기에 대한 집착(오취온-五取蘊)의 세상에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자가 여러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어떤 것도 붙잡을 이유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자신이 어떠하다는 행위에 대한 어떤 갈망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것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지금, 직접적인 앎을 통해서, 모든 것은 덧없고, 오고, 가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수행자가 어떤 것에도 집착 안하고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의 갈망과 붙잡음이 임시적으로 억제되거나 또는 잠깐 동안 없어집니다. 수행자가 어떤 것에 갈망이나 붙잡음을 갖지 않을 때, 수행자는 그가 관찰한 물체들에 대하여 갈망과 붙잡음을 잠시 제거했고 관찰하지 않은 물체에 대하여는 얼마동안 갈망과 붙잡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갈망과 붙잡음의 잠시동안 제거”라고 부릅니다. 


수행자가 그가 관찰한 물체들에 대하여 갈망과 붙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 때, 수행자는 관찰하지 않은 물체에 대하여도 갈망과 붙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능력을 “임시적 제거”라고 부릅니다. 수행자는 그들이 관찰한 물체에 대해서는 잠시동안 제거를 관찰하지 않은 물체에 대하여는 임시적 제거를 수행합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제거를 통하여, 수행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 나는 대로 현상을 관찰한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지낸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무엇을 하던지, 걷던지 또는 서있던지, 앉던지 또는 눕던지, 또는 어떤 작은 자세를 취하던지 마음을 챙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그들의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유지하고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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