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그 이상의 아름다움 (김정빈 수필)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10-07-02 11:35     조회 : 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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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그 이상의 아름다움

 

김 정 빈(작가, 호두 마을 프리 위빠싸나 지도 법사)

 

 

1995년. 태국을 거쳐 미얀마에 갔다. 위빠싸나(vipassana) 명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깊은 감동에 젖어 있었다. 이천오백 년 동안 연면하게 이어져 온 불교의 가장 순수한 전통과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이 나를 한껏 고양시켰던 것이다.

 

 양곤의 찬메(Chanmyay) 수도원에서 나는 출가 절차를 거쳐 승려가 되었다. 무소유자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홀가분함, 온종일 수행에만 전념하는 일과의 연속…. 그것은 세속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처음 맞는 일요일, 나는 선배 스님들을 뒤따라 탁발을 나갔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여러 곳에서 공양물을 받았다. 신자들은 음식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맞았고, 어떤 신자들은 연필이나 공책 같은 작은 일용품을 공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 곳에 이르러, 나는 다섯 살쯤 되는 어린아이가 할머니 한 분과 함께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우리들을 향하여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문득 고국에 두고 온 두 아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때 거기에서 보았던 것이다. 우리네 사람살이의 바탕을. 그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아프고, 진지한 것인지를.

 

 한 할머니의 늙어 지친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보다는 오히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느꼈다. 그 어린아이의 등뒤에도 어김없이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삶의 짐이 실려 있음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고단한 존재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어른과 어린아이의 구별은 없다. 모든 인간은 현재 늙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늙어야 하고, 현재 살아 있더라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정직한 고찰과 진지한 수행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단함으로부터 불교는 일어선다. 그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 짐을 훌훌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은 자로서. 부처님에 의해 밝혀진 길은 삶의 아픔과 고단함을 맞이하여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사람, 성실하게 대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간절한 의미를 지닌 길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아름다움이 어려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眞)은 선(善)과 만나며, 그 진 · 선의 조화야말로 미(美)인 것이다.

 

 위빠싸나는 자기 자신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불교는 그 어려움을 물리치고 정직과 진실이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 확고한 법(法, Dhamma)을 세운다.

 

 선인(善因)으로부터는 오직 선과(善果)가 나올 뿐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러나 악의 길을 물리치고 전적인 선의 길만을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어려움에 대항하여 결코 진실을 굽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윤리의 길은 고귀하다.

 

 그러면서도 불교가 반드시 어렵기만 한 길은 아니다. 그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나와 남이 함께 좋은 길’이기도 하다. 어렵지만 갈만하고, 가면 간 만큼 행복한 길이 불교의 길, 나의 길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위빠싸나 명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위빠싸나 수행을 통해 이같은 불교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 아름다움을 한껏 누렸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아름다움 안에 머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는 불교적인 아름다움의 저변에는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는 무상(無常)과 고(苦)를 바탕으로 하여 서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덧없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모든 중생이 괴로운데 어찌 안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덧없는 세상, 덧없는 육신, 덧없는 마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결과 슬픔을 배경으로 하는 중생계의 아름다움은 새로운 차원― 수행자의 차원의 아름다움으로 전개된다.

 

 그렇다. 수행자의 마음은 평등(平等, upekkha)을 지향한다. 마음은 시소와도 같은 것― 어느 때는 슬픔에 머물고, 어느 때는 기쁨에 머문다. 그러므로 마음의 시소는 오르내림을 그쳐야 한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시소의 중간 지대에 머물러야 한다.

 

 같은 의미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또한 시소의 양편으로서 함께 버려진 다음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오오, 맑게 깨어 있어 투명하고, 고요하게 멈추어 있어 평화로운 그 아름다움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지극한 아름다움은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초세간적인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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