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또는 수행으로부터의 따뜻한 마음 2 (수필)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10-07-30 10:24     조회 : 5544     추천 : 0    
  트랙백 주소 : http://www.vmcwv.org/bbs/tb.php/menu6_2/59

 

행복, 또는

 

수행으로부터의 따뜻한 마음 2

 

 

김 정 빈

(작가, 호두마을 프리위빠싸나 지도법사)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아름다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은

그 모습 언제나 꿈속에 있네…….

 

 아내는 제 노래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보다 오히려 제가 더 감동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이란(예술이란) 그 향수자와 마찬가지로, 또는 향수자보다도 더 그 창조자(연주자)를 행복하게 하는 법인데, 그때의 경우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이 저를 어떻게 행복하게 했는가의 이야기입니다만, 이 음악을 통한 행복은 제가 작년에 문순우 화백을 알게 됨으로써 더욱더 질이 높아졌습니다.

 

 재작년, 안성에 사는 장석주 시인과 오랜만에 다시 만나 교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학인으로 등단하던 초기에 만난 장 시인은 저의 시집 《감꽃 마을》에 해설을 써 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서로 연락이 없었다가 재작년에 다시 인연을 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작년의 어느 때, 장 시인은 저에게 문순우 화백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문 선생은 안성에서 큰 작업실을 갖고 작업(회화 · 사진 · 조소 등)을 하는 한편, 많은 지인들과 어울려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분의 작업 공간에 매우 우수한 성능을 가진 오디오와 아주 훌륭한 영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문 선생의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어느 때는 구하기 어려운 영상물이, 주로 음악과 관련된 영상물이 상영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문 선생의 작업실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 영상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이 유명한 가수를 저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보첼리는 저를 아주 매혹시켰습니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저는 얼마 뒤에 제 가족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팀을 구성하여 다시 문 선생 댁으로 가서 보첼리의 노래를 감상하였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자주 문 선생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연스레 문 선생의 부인과도 교분을 갖게 되었고, 문 선생의 여러 지인들과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문 선생의 부인은 저에게 명상을 배우게 되었고, 저의 영상 제작을 여러 모로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저희는 함께 중세 스페인의 탁월한 가톨릭 명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에 관한 전기를 돌려 가며 읽었습니다.

 

 문 선생과의 교유를 통하여 저는 미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4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강의와 공연을 묶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 선생은 저에게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기폭제로서 다가왔습니다.

 

 그 같은 정황은 ‘내적 평화’를 추구해 온 저의 심리 공간에 ‘예술적 아름다움’이라는 또 다른 색조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어우러져 ‘행복’을 만들고, 성장시켰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아내라는 이름의 친구’와 공유하였습니다.

 

 두 아들로부터의 행복

 저를 행복하게 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저의 ‘두 아들’입니다.

 

 저에게는 이번에 제대를 한 아들 말고도 또 하나의 아들, 즉 작은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지금까지, 특히 작년에 저를 아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의 자녀 교육 이야기를 들은 어느 출판사에서 그에 관한 책을 한 권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정도로 저는 아들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앞에서 저는 글을 쓰지 않는 9,10개월 동안 책을 읽거나 사색을 했다고 말했지만, 이 점에서 보자면 그 기간에 저는 아들들을 지도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저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아들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그 지도의 핵심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였고, 그 행복을 달성하는 길은 ‘물 퍼 오기’와 ‘컵 줄이기’라는 ‘두 길’로 압축됩니다.  

 

 전자는 사회적 경쟁 환경에서 남들을 앞섬으로써, 즉 ‘우물가’에 나가 ‘물’을 퍼 옴으로써 얻어지고, 후자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여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즉 욕심을 버리고 소욕지족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두 길을 중심으로 저는 전자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후자에서 인격을 함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들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큰아들의 경우,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저와 아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전화를 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행복이라는 목표와 그에 따르는 방법의 문제, ‘컵 줄이기’와 ‘물 퍼 오기’, 외국 생활에서 아들이 느끼게 되는 고독 - 고독의 원인과 그 철학학적인 의미, 고독에 대처하는 방법 등에 관한 것이 주로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인(동북아시아인)과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차이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대체로는 2,30분, 길면 한 시간 이상 계속되는 이 전화를 통한 대화(토론, 상담)는 아들의 인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저의 마인드는 아빠와 95퍼센트는 같아요”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아들이 저에게 ‘세뇌’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고, 저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대학생인 아들에게는 ‘단지 말뿐인’, 실천이나 인격의 뒷받침이 없는 교훈은 전혀 먹히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아버지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이 지적되면 곧바로 그것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전제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린 대화는 저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아들을 지도하는 멘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로부터 충고를 듣는 멘티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오래 전부터 아랫사람으로부터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제 잘못을 지적당하면 그것이 옳다고 여겨질 경우 곧바로 받아들이기로 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늘 마음에 모시고 있는 스승인 공자님으로부터의 영향일 수도 있고, 젊은 한때 ‘무지의 지’라는 중대한 가르침을 베풀어 준 소크라테스로부터의 배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의 일입니다. 저는 어느 때 아들에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잠시 흥분했다가 곧 제 실수를 깨달은 저는 곧 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였습니다. 아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괜찮아요, 아빠”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훗날 아들은 “그때 아빠가 저에게 죄인처럼 사과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때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큰아들이 저와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생으로서, 방학을 맞아 큰아들이 돌아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때 작은아들이 큰아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집에 오면 내가 반가워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못해. 내 이성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 감정은 그에 따라주지 않아. 난 형이 집에 돌아오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중학교 3학년생의 표정은 비장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은, 나도 이제는 형에게 충고의 말을 할 수 있다고, 또는 형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이 말을 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형이 장난감을 혼자서만 갖고 놀았어. 나는 재미없는 것만 갖고 놀아야 했단 말이야. 그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그래서 나는 지금도 형이 좋아지지가 않아. 지금의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 형은 똑똑하고, 밝고, 올바르고, 친절해. 그렇지만 내게는 전에 가졌던 형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잘 없어지지 않아.”

 

 저는 긴장하였습니다. 이럴 때 큰아들이 화라도 낸다면 형제간의 우애에 큰 금이 갈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는 큰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큰아들의 표정은 담담하였습니다. 큰아들은 말을 듣는 즉시 그것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는데, 그 정리는 ‘자기의 잘못에 대한 흔쾌한 인정, 사과’로 귀결되었습니다.

 “네 말 그대로야. 그땐 내가 너무 했지.”

 

 큰아들은 순순히 아우의 비판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그땐 내가 잘못했어. 지금이라도 용서를 해주면 고맙겠다.”

 

 우리 부부의 놀랐던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파도는 일어나자마자 잦아들었고, 저는 두 아들에게 이런 경우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요점을 짚어 주었습니다.

 

 그 뒤부터 작은아들의 형에 대한 태도는 변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 작은아들은 형에 대해 이중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예전의 형이 좋아지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형이 잘나고 똑똑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때의 화해에 의해 좋지 않던 감정이 사라지고 나자, 이제는 형의 잘나고 똑똑해 보이는 것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의 앙금 때문에 다 보지 못하고 있던 형의 지금의 모습 -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모습을 보게 된 작은아들이 어느 때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형은 제 이상형이에요.”

 

 그리고 재작년, 대학 입시를 위한 서류에 가족에 대한 의견을 적는 과정에서 작은아들은 형에 대해 ‘존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그 서류에 “저는 제 부모님과 형을 존경합니다”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존경은 으레 존경하게 마련인 부모라는 대상에 덧붙여져 따라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인 존경과는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작은아들은 큰아들을 ‘존중’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고,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큰아들이 작은아들로부터 ‘존중(존경)’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존중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그 이상으로 존중(존경)했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저는 이런 형제를 아들들로 가진 부모로서의 저 자신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가(저희 부부가) 두 아들을 존중해 준 것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아들이 저로부터 겸허한 자세에 관한 멘토링을 잘 받아들이고 체화한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멘토링은 작은아들에게도 큰아들과 거의 동일하게 베풀어졌습니다.

 

 큰아들과는 달리 작은아들은 한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이 경우 또한 세상사는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아들과는 대화의 면에서 볼 때 가까이 있다 보니 오히려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이 고독감을 느낄 겨를이 없는(적은) 환경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독감을 느끼지 않으면 마음을 다스릴 필요성이라든가 정신 · 마음 ·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저의 멘토링이 작은아들에게 침투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큰아들에 비해 적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과정은 학생에게 엄청난 부담을 강요합니다. 오후 네 시경에 정규 공부가 끝난다는 점에서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같았지만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큰아들은 그 이후 현지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 동아리를 만들어 보컬로 활동했지만, 작은아들은 그때부터 또다시 공부가 시작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작은아들은 큰아들과는 또 다른 정신적 문제와 마주쳤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멘토링이 작은아들에게 침투해 들어갈 여지가 확대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작은아들은 저를 멘토로 받아들여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큰아들에게 했던 말을 작은아들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린 평생 친구로 지내는 거야, 알았지?”

 

 두 아들의 다른 점은 이 말에 큰아들이 “네. 그럼요!”라고 자랑을 섞어 대답한데 비해 작은아들은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라는 점뿐입니다. 이것은 큰아들이 자기표현이 풍부한데 비해 작은아들은 말수가 적고 과묵하다는 차이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두 아들을 친구로 얻었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다시 세상에서 드문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한 명의 진정한 친구만 얻을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격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그냥 친구도 아니고 아들을 겸한 친구, 제자를 겸한 친구를 두 사람이나 얻었으니, 거기에 더하여 아내까지도 친구이자 제자를 겸하고 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저는 진정한 친구를 ‘나의 속내를 알아주는 사람(知己)’, 또는 ‘나의 슬픔과 기쁨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隨喜, 同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두 아들은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저의 아내는 두 아들과 더불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알고, 저를 가장 잘 이해하며, 제 슬픔과 기쁨에 가장 깊이 공감해 주는 사람이니, 저는 세 명의 훌륭한 친구 · 지기 · 동희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나라 학부모가 가장 중요시하는 대학 입시의 계절이 왔습니다. 다행하게도 작은아들은 수능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60만 명 가량의 수험생 중에서 0.5 퍼센트 정도에 해당되는 성적을 거둔 것입니다.

 

 비록 평소의 실력이 그대로 수치화된 것이었다고는 해도, 또 사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보다(물 퍼 오기) 더 중요한 것은 옳고 바르고 당당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이라고(컵 줄이기) 누누이 강조해 온 아버지인 저라고는 해도, 그 성적은 저에게 매우 기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작은아들의 학업 성취를 음미하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적을 기반으로 작은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격이 밝아지고, 과묵한 성격 때문에 걱정이 되던 교우 관계도 개선이 되어 갔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대학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오보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인성에 행복을 이루는 한 원천이 될 것입니다.

 

 큰아들에게서 발견하는 황금율

 한편, 저의 큰아들은 재작년에 외국어 시험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는 특기병으로서 서울 한복판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자기의 부대 안에서 단 한 명만을 뽑는 삼중의 선발 과정을 거쳐 부대 총사령관을 가장 가까운 데서 모실 기회를 얻었습니다.

 

 별이 넷이나 달린 군인 최고 직위의 장군을 1미터 거리에서, 그것도 수시로 자주 접한다는 것이 육군 일등병에게 어떤 느낌일지는 군 생활을 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상상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여 저의 큰아들은 군 생활을 통해 남다른 특별한 체험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때 아들은 고위 장성들의 부부가 모인 연회에서 한미 연합사령부 총사령관인 벨 장군의 부인을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벨 부인이 보여준, 남을 배려하는 우아한 태도에 감동했던가 봅니다(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겠습니다). 며칠 뒤에 휴가를 얻어 집에 온 아들은 그때의 경험을 제게 말하고 나서 “그런 부인을 가진 군인이 대장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예요” 하더니, “저도 그런 아내를 가질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과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생기는 법이야” 하고 제가 말했습니다. “다만 나는 그 분의 매너 있는 행동 자체보다는, 매너의 배경에 있는 그 분의 마인드에 유념하고 싶구나. 결국 그 마인드는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다음 저희는 저희 부자가 열 차례 이상 토론한 스티븐 코비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에 나오는 ‘성격적 접근’과 ‘성품적 접근’에 대해 재토론 겸 재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결국 저희의 대화는 사람에게 있어서 남들의 고통(어려움)에 공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입니다.

 저는 승용차의 옆자리에 큰아들을, 뒷자리에 아내를 태우고 고속도를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톨게이트 여직원이 계산을 마치고 요금 카드를 돌려주며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대답을 해 주는 경우가 드뭅니다(요즘에는 대답을 합니다). 그냥 고개만 끄덕하고 마는 편인데, 그날 내 옆자리에서 아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들은 그냥 그 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한 톤 높여서, 상대방이 기분이 좋아지도록 목소리의 분위를 한껏 띄워서, 그것도 모자랐던지 조수석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왼쪽으로 여직원 쪽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아들, 참 특별하기도 하지.”

 조금 뒤에 저는 칭찬의 의미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여기에서 저는 제 아들이 한 말-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쉽게 흘려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저 분은) 얼마나 힘들겠어요?”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곰곰 짚어 보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아들이 잘났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실제 사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래야만 읽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힘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아니라도 누구든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의미심장한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앞에서 의미심장한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은 여러분의 자녀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여 저는 지금 “우리가 가끔 겪게 되는 일들 중에 숨어 있는 의미심장함” 중에서 한 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최대치로서 본다면, 제 아들이 한 말 “얼마나 힘들겠어요?”에는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윤리의 황금율, 바로 그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 또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황금율(gold rul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비단 예수님만의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님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 힐렐도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받들어온 율법서를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이다.” 부처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욕하고 때리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어떻게 남을 욕하고 때릴 수 있겠는가?”

 

 요컨대 황금율은 ‘감정이입’의 문제입니다. 저는 나치 전범들의 재판을 다룬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한 주인공이 “악이란 감정이입의 부재”라고 말하는 것을 본(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선이란 감정이입 바로 그것”으로 번안할 수 있는데, 동서고금의 모든 철인들 또한 이런 의미의 말씀들을 남겼습니다.

 

 요즘 일곱 명의 목숨을 앗은 살인 용의자 강호순의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는 정신적 장애를 가리키는 의학 전문용어입니다. 남의 고통이 나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남의 고통을 보면서 조금의 동정심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 이 차가운 사이코패스의 마음은 뱀의 마음일지언정 사람의 마음일 수 없습니다.

 

 좀 거창해진 감은 있지만, 어쨌든 제 큰아들이 한 말 “얼마나 힘들겠어요?”에는 이런 종교 철학적인 심원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해 서해안의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우리 국민 백만 명이 청소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깊은 수준의 감정이입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약속한 그 때에요!"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만복골1길 207   |   전화 (041) 567-2841   |   팩스 (041)567-2842   |   E-mail : hoduvipa@hanmail.net
사단법인 위빳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   정창근   |   312-82-08949 통신판매업신고 제2014-충남천안-451호
Copyright(C) 2007 사단법인 위빳사나 명상센터 호두마을. ALL RIGHT RES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