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기본에 대한 사야도 법문
  글쓴이 : 마을지기     날짜 : 11-03-16 10:28     조회 : 5834    
  트랙백 주소 : http://www.vmcwv.org/bbs/tb.php/menu7_1/164
<수행의 기본에 대한 우 떼자니야 사야도 법문>
 

바른 견해로 알아차림 하세요.

 
 
 
 
통역 ; 청현스님
옮겨적은이 ; 쉐우민에서 수행하는 요기들
 
 
 
이 자료를 읽는 분들에게
 
- 이 자료는 사야도께서 수행을 시작하는 요기들을 위해 하신 즉석 수행법문 중 08년 11월    19일, 09년 8월 13일 것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글은 정교한 구조와 논리를    갖춘 자료는 아닙니다.
 
- 단지 쉐우민에서 수행을 배우려는 요기들을 돕기 위해 초보자를 위한 사야도의 여러 법    문 중 일부를 선택하여 옮겨 적은 것입니다.
 
- 글 전체의 구조는 사야도의 법문구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다만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    기 위해 사야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글들을 재구성 하고 일부는     다른 법문에서 가져와 내용을 보완하였습니다.  
 
- 이 법문에 이곳 수행법의 중요하고 기초적이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내용들은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이 수행법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쉐우민에서 새롭게 수행을 시작하는 분들은 먼저 엠피3나 이 글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도록 반복하여 듣거나 읽을 것을 권합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 먼저 수행에 대    한 기본 정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혹 이해가 안 되는 부     분이 있으면 인터뷰 시간에 사야도께 질문하면 좋을 것입니다.
 
- 수행을 하는 중에도 가끔 엠피3를 듣거나 이글을 읽으시면 수행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    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배운지 오래된 수행자들도 수행이 정체되거나 수행    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다시 점검하고 싶은 경우에도 엠피3를 듣거나 이 글을 읽으시    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바른 견해로 알아차림 하세요.

 
수행은 좋은 마음, 법다운 마음들을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수행하기 전에 먼저 마음가짐과 어떤 견해로 수행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수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집중만 해가지고 앉아있다고 해서 그걸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집중만 하는 것이지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좋은 마음도 있고 나쁜 마음도 있습니다. 좋은 마음들, 법다운 마음들을 자꾸 키워 나가는 것 그것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좋은 마음을 더 좋게끔 기르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들을 길러 줄 것 같으면 나쁜 마음은 저절로 줄어들게 됩니다. 여기서 좋은 마음이란 사티, 사마디, 위리야, 신심, 지혜를 말합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이 다섯 가지 마음의 힘을 점점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나쁜 마음들을 줄어들게 하기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다 탐, 진, 치라는 나쁜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줄어들게 하기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을 오래했다고 하면 좋은 마음이 증장되어야 됩니다. 나쁜 마음들은 줄어들고 좋은 마음들은 증장되어야 합니다.
 
 
수행은 몸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몸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두어야 합니다. 몸의 일이 아니고 대상의 일이 아니고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수행하는 것이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그것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아나요? 마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자신의 체험으로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지금 글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엉덩이가 의자에 닿아있는 느낌을 알 수 있나요? 그 닿은 느낌을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주의를 발바닥으로 보내보세요. 다시 어깨로 보내보세요.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안다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어깨의 느낌이 좋은가요? 아니면 싫은가요? 이렇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안다면 그것도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글은 읽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안다면 역시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감정들, 뭔가 먹고 싶어 하는 것 등도 마음입니다. 마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 생활하면서 항상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손이 이 문서를 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나요?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만약 마음이 문서를 잡고 있는 손에 가 있지 않고 딴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 느낌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이 손에 가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상과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손이 닿아있는 느낌은 대상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요? 물론 아는 마음입니다. 만약 마음이 딴생각을 하고 있다면 손이 종이를 잡고 있지만 잡고 있는 줄 모르게 됩니다. 대상은 있지만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대상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대상이라고 합니다. 마음도 대상이 될 수가 있고 몸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탐심, 진심, 치심으로 수행해서는 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마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수행하는 마음이 잘못된 마음이고 나쁜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행하는 마음은 법다운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법답지 않은 마음으로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수행을 잘못하게 됩니다. 내가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가 수행을 합니다. 견해가 잘못되게 되면 수행이 다 잘못되게 됩니다. 잘못된 수행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탐심으로 수행한다면 그것을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수행입니다. 탐심, 진심, 치심으로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대상을 보고 싶어 하고, 어떤 대상은 일어나길 바라고, 어떤 대상을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어떤 상태가 되길 원하고, 특별한 뭔가를 얻기를 바라면서 수행하는 것은 탐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대상을 거부하거나 없애려고 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은 진심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행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서 수행하는 것은 치심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탐, 진, 치로 수행해서는 법답게 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올 때는 법을 얻기 위해서 오지마세요. 수행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수행을 할 줄 알게 되면 법은 저절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굳이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수행을 할 줄 알게끔 하세요. 인터뷰 때에는 내가 수행을 어떻게 했습니다하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세요. 그렇게 하면 그것에 대해서 사야도가 의논해주고 조언해 줄 것입니다. 내가 수행을 할 줄 알게 된다면 수행을 하는 만큼 얻게 됩니다. 수행을 할 줄 모를 것 같으면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다 해도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를 바라지 말고 우선 수행할 줄 아는 지혜가 나도록 노력하십시오.
 
수행을 할 것 같으면 힘들어질까요? 아니면 편안해 질까요? 법으로서 법답게 수행을 할 줄 모르면 잘못된 수행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티빳따나경에서 뭐라고 말씀 하셨냐하면 수행을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고 도와 과와 닙빠나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들게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힘들게 억지로 하지 말고 멈추세요. 몸과 마음이 다 힘들게는 수행을 하지마세요. 마음이 괴롭게는 수행을 하지마세요. 여기서는 너무 힘을 주어서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지혜가 있게 수행을 해야 됩니다. 대상 쪽과 마음 쪽을 이해하도록 수행하세요.
 
대상이란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한테 대상이 몇 가지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여섯 문이 있습니다. 눈, 코, 귀, 혀 몸, 마음 이렇게 여섯 문이 있습니다. 대상은 눈으로, 귀로, 혀로, 몸의 감촉으로, 그리고 마음의 문인 의식을 통해 들어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간에 대상은 이 여섯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다 대상입니다. 대상과 작용하는 마음,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상은 이미 있습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느낌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기가 해야 할 일은 마음 쪽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티가 있어야 하고, 신심이 있어야 하고, 노력이 있어야 하고, 사마디가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몸의 느낌만이 대상이 아니라 보는 것<마음작용>도 대상이고 보이는 형상도 대상입니다. 듣는 것<마음>도 대상이고 들리는 소리도 대상입니다. 냄새 맡는 것<마음>도 대상이고 맡아지는 냄새도 대상입니다. 맛보는 것<마음>도 대상이고 맛도 대상입니다. 일어나는 생각<마음>도 대상입니다. 어떤 대상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사티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대상으로든지 내가 사티가 있도록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의 들숨, 날숨과 배의 일어남, 사라짐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 대상이라고 생각되세요? 어떠한 것도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대상이고 저것도 대상이고 둘 다 같은 대상입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며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수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써 수행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 번도 연습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했다하면 전부 눈을 감고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의 대상이 굉장히 분명합니다. 눈을 뜨는 그 순간에 바로 보입니다. 뭘 찾을 필요가 있나요? 자연스럽게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하는 방법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타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걸 원하시나요? 고요해 지길 원하시나요? 지혜가 나길 원하시나요? 그 목적이 다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방법도 틀리고 견해도 틀리고 다 틀립니다. 요기 스스로가 알아야합니다. 내가 고요해지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지혜가 나고 싶어 하는가? 고요해지고 싶으면 고요해지도록 수행을 해야 되고 지혜가 나고 싶으면 지혜가 나도록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 두 가지가 뭐가 어떻게 다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고요해지게 하려면 대상에 유의해야 됩니다.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다가 유의해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마음에 탐, 진, 치가 들어 있을 것 같으면 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요해지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한 대상에만 집중해야 됩니다. 지혜가 나기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많은 대상과 관계해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볼 것 같으면 지혜의 힘이 약합니다. 많은 것을 알아야만 지혜가 납니다. 지혜의 힘이 좋아집니다. 고요해지고자 수행하는 사람은 한 대상을 집중해서 잡고 그것을 놓지 않고 봐야만 고요해집니다. 그것은 힘을 주어서 한 대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것은 되게 하려고 해야만 됩니다. 지혜가 생기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대상에 너무 집중하지도 않고 대상을 꽉 잡지고 않고 오히려 그걸 놓으려고 합니다. 힘을 줘서 특정 대상에 집중해서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지혜롭게 해야만 됩니다.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롭게 해야만 됩니다. 지혜롭게 계속적으로 알아야만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봐야 됩니다. 보는 마음에 조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견해가 발라야만 됩니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로바로서 알고자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떤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로바로서 알고자 한다면 마음에 힘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힘을 주어서 집중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사티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항상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아침에 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해야 합니다. 너무 집중하는 사람은 힘들어서 하루 종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몸 전체를 한번 보세요. 그냥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뭐가 있나요? 앉아 있는 것 알 수 있나요? 닿는 느낌을 아나요? 시원하고 더운 것을 아십니까? 만약 이런 몸의 느낌과 관련된 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다면 그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것만 알아차리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정대상을 봐야겠다고 정해놓으면 다른 대상은 들어오질 않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른 대상엔 아예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하는 것, 그런 다른 대상들이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한가? 동요하는가? 긴장하는가? 들 떠는가? 그런 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앞에 이야기 한 것을 알기위해서 얼마나 집중을 해야만 되겠습니까? 별로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게 수행하면 안 됩니다. 알 수 있는 대상을 어떤 대상이든지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티가 있기만 하면 됩니다. 좌선을 할 때도 그렇게 알아차리면 되고 경행을 할 때도 먹을 때도 방에 있을 때도 그렇게 알기만 하면 됩니다.
 
견해가 바른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견해가 바른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봐야할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몸의 느낌으로는 뜨겁고 차가운 것, 부드럽고 딱딱한 것 등이 있습니다. 이런 몸의 느낌은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연적 이치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좋은 마음, 나쁜 마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생각, 여러 감정들 등도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나의 마음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연적 이치로 알아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자연의 이치일 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대상 쪽이든 마음 쪽이든 둘 다 그냥 법의 자연적인 성품일 뿐입니다. 자연적인 이치 일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더운 것도 내가 더운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적이 이치일 뿐입니다. 더운 것은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내 몸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도 내 마음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라고 생각을 하도록 하세요.
 
바른 견해로 해야만 되고 사티가 항상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요기가 해야 할 일들은 단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른 견해로서 해야만 되고 사티가 항상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계속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사티란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견해로 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자신에게 뭘 알고 있는가? 하고 물어주면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서 몸에 어떤 느낌이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사티가 있게 되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 내 마음에서 무슨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도 사티가 있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 몸에서 무슨 느낌이 일어나고 있지 생각하면 마음이 바로 몸에 가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무슨 마음이 일어나고 있지 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을 보게 됩니다. 뭐가 있지 라고 생각을 할 때 힘줘가지고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티를 두는 것은 마음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방황하는 것을 한쪽에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알고 있지? 이렇게 마음에 경고를 한 번씩 해 주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바로 마음이 그것을 보게 됩니다. 몸에 무슨 느낌이 일어나고 있지 생각하면 바로 관심이 몸으로 가게 되고 마음에서 무슨 마음이 일어나고 있지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에 사티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한 번씩 대상을 어떤 견해로, 생각으로 보고 있는가를 점검해 주면 됩니다. 자연적 이치로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가?
 
사마디는 집중한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아주 깨끗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집중을 한다고 해서 사마디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견해가 바를 때에 사마디가 생깁니다. 노력이란 집중해서 힘을 줘서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끈기 있게 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해 나가는 것, 그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수행 중에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도 대상일 뿐이고 소리도 대상일 뿐입니다. 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일 뿐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은 어떤 대상이 오든 간에 바른 견해로서, 수행으로서 하게 됩니다. 바른 견해로 수행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을 원인으로 사티, 사마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견해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대상이 오던지간에 그 대상으로 인해 탐심, 진심, 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났을 때 생각의 내용을 보지마세요. 단지 생각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알도록 하세요. 작용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처음에는 생각을 오랫동안 보려고 하지마세요. 생각이 일어난 줄 알고 바로 몸의 느낌으로 오도록 하세요. 만약에 처음부터 생각의 내용을 보거나 생각을 계속 보게 되면 아직 마음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생각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 해서 나중에 생각을 지켜볼 수 있으면 그때는 생각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덥기도 하고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저리기도 하고 가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보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럴 때에는 마음에 못견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못 견뎌 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 만큼 보도록 하세요. 가려움이나 아픈 것, 그런걸 보지 말고 못견뎌하는 마음을 보도록 하세요. 그 마음을 보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면 끌거나 자세를 바꾸어 주어도 됩니다. 그리고 못견뎌하는 마음을 봐서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때는 가려움이나 아픈 느낌을 봐도 됩니다. 사람들이 아픈 것을 왜 못견뎌하는가 하면 아픈 것은 나쁜 것이라고 고정관념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면 못견뎌합니다. 아픈 것에 대하여 이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라고 바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못견뎌하지 않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아픈 것에 대해 거부하는 마음이 없을 때는 어떤 마음들이 일어나고 거부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어떻게 쓰면 몸의 느낌이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아픈 것이 사라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플 땐 어떻게 되는가?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을 보면 어떻게 되고 그럴 때 몸의 느낌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계속 관찰함으로서 그것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운맛을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 매운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대상과 부딪쳤을 때에 <만났을 때에>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계속 관찰하다보면 내 마음이 이럴 때 이렇게 되고 저럴 때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어떻게 상상을 하는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요? 어떤 때는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지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이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화가 있을 때 그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 화가 없을 때 그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를 배울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 것들 관찰해야만 됩니다.
 
탐심이나 진심이 없을 때에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소리가 들렸을 때에 그 소리는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면 거기에는 원하는 마음도 없고 못마땅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자연의 이치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일 뿐입니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만약 큰소리가 들리면 어떨까요? 대부분 사람들이 나쁜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가 날것입니다. 그냥 큰소리를 단지 큰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까요? 큰소리는 단지 큰소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주 고요한 것, 소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는 좋은 것인가요? 나쁜 것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좋은 것이라 생각할 것 같으면 고요한 상태에서는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시끄러운 상태에서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을 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프면 아이고 아파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몸이 있으면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을 하나요?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막내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자신도 화가 나나요? 그 사람이 화가 났으면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단지 그렇게 보세요. 그 사람이 화가 났는데 내가 같이 화가 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바르게 할 줄 알 것 같으면 마음이 훨씬 더 편해집니다. 사람들이 딱 분별해서 이것은 좋은 것이다. 저것은 나쁜 것이다 정해놓으면 좋은 것 나쁜 것에 대해서 마음이 자꾸 반응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동요하게 됩니다. 이 이치를 어느 곳에든 다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원하는바가 없고 좋아하는 것이 없게 되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할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견해가 중요합니다.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단지 다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줄 알고 그런 생각으로 계속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티하는 목적은 대상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나 특별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과 그들간 관계의 자연적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이런 것들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 그 이해한 만큼 자연스럽게 좋은 마음들의 힘은 증장될 것입니다. 또 그 만큼 나쁜 마음들의 힘은 줄어들 것입니다.
 
대상을 억지로 찾으려고 하지마세요. 그냥 마음이 뭘 알고 있지? 이렇게 생각만 하면 됩니다. 뭘 알고 있는가 하고 그것만 체크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뭘 알고 있지? 라고 물으면서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것을 항상 하고 있으면 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좌선하는 것을 수행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앉아 있을 때에도 사티가 있어야 되고, 경행을 할 때도 사티가 있어야 되고, 먹을 때도 사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항상 사티가 있을 때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행할 때 뭘 알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다리만 집중해서 보지마세요. 그냥 걸어가는 것을 알도록 하고 그러면서 마음이 뭘 알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세요. 뭘 알아차려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이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면 됩니다. 마음이 발에도 가고 머리에도 가고 손에도 갈 것입니다. 마음이 발에 가면 발에 가는 줄 알고 발의느낌을, 머리에 가면 머리에 가는 줄 알고 머리의 느낌, 손에 가면 손에 가는줄 알고 손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디든지 상관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공양할 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지금 사티가 있는가. 그걸 알아차리도록 하세요. 뭘 하든 간에 사티가 있으면 됩니다. 자주 자주 사티가 있는가 하고 체크하도록 하세요.
 
 
 
<덧붙임 자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대해
 
<이것은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게 하기위해 대상과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이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깥대상은 알면서도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해서 보는 것과 보여서 보는 것이 같은가요, 다른가요?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은 마음이 보려고 어떤 대상에 집중을 합니다. 보여서 보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보려하지 않아도 그냥 보입니다. 보이기 때문에 보는가요? 보기 때문에 보이는 가요? 어떻게 생각 하세요? 사람들이 원하는 마음으로 볼 때는 내가 봐야 보인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자연의 이치대로 볼 것 같으면 보이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 보지 않아도 눈을 뜨고 있으면 그냥 보입니다. 보이는 성질 그것을 단지 아는 것입니다.
 
보는 것 하고 듣는 것, 그 두 가지는 성질은 똑같습니다. 단지 귀와 눈이라는 문이 다를 뿐입니다. 보고 듣는 문만 다릅니다. 눈을 통해서 볼 것 같으면 본다고 말하고 귀를 통해서 들을 것 같으면 그냥 듣는다고 말합니다. 듣는 것도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소리 쪽에 가서 들으려고 합니다. 소리 쪽에 가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귀에 와서 닿기 때문에 들리는 것입니다.
 
출처: 다음까페 쉐우민숲속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만복골1길 207   |   전화 (041) 567-2841   |   팩스 (041)567-2842   |   E-mail : hoduvipa@hanmail.net
사단법인 위빳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   정창근   |   312-82-08949 통신판매업신고 제2014-충남천안-451호
Copyright(C) 2007 사단법인 위빳사나 명상센터 호두마을. ALL RIGHT RESRVED.